BITTER
<To the horizon>
W. 공
토깽 님
공백 미포함 2073자
네가 내게 해준 일들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있어요. 인간이 아닌 것들을 위해 기꺼이 나서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슬픔과 원망의 뒷면을 보아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알아요. 네 덕분에. 하지만 한 가지 고백해야겠어요.
나는, 지쳤어요.
답이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도. 부름을 기다리는 일도. 파괴와 살생도. 나는 질려버리고 말았어요. 내가 인간을 흉내 내어 굳이 이렇게 글자로 내 심정을 전하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네요. 나는 바다로 갈 거예요. 아주 깊은 바다로. 심해로. 춥고 어둡고 광활한 나의 무덤으로. 피가 느려지겠죠. 짜부라진 폐에 물이 들어찰 공간은 차마 없을 거예요. 네가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나는 갈 거예요. ……찾을 것 같아서. 따라오려고 기를 쓸 것 같아서. 그래서 이렇게 적어요. 나는 완전히 지쳤어요.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요.
네게……. 그래요. 네게 기대어 더 숨을 이어가기에는 내 사명과 의무가 너무 버거워요. 때가 되면 여신께서 나를 꺼내고 내가 사명을 다하게 해주신 다음 나를 벌주시겠죠. 그러고 나면 나는 마침내 무로 돌아갈 거예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숨을 잇기 힘겨울 때마다 너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던 순간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한 걸음 더 걸었어요. 지젤. 이제는 걸음을 멈출 때가 왔어요.
네 탓은 아니에요.
너는 충분히 잘해 주었어요.
이 편지는 태워줘요. 그러나 너만은 나를 잊지 마세요. 아인체이스 이스마엘이 세상의 끄트머리에 서서 비명처럼 너의 이름을 종이에 새겼다는 걸 너만은 잊지 말아 주세요.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말고 그리워하지 말며 보고 싶어 하지 마세요.
나 역시 그럴게요.
✻
지젤은 고개를 들었다. 채 마르지 않은 잉크가 급히 마무리한 듯 번져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방을 뛰쳐나갔다. 바다. 어디로. 어떤 바다로. 너무 많다. 너무 넓다. 하지만. 지젤은 편지를 꽉 구겨 쥐었다. 찾아야 해. 찾아야 해. 답장을 들려줘야 해. 멋대로 스스로를 구금해 버리는 짓은 관두라고 말해야 해.
아인체이스 이스마엘. 저는 당신을 찾을 거예요…….
아인은 그 시각 자신이 왜 굳이 이 바다로 왔는지 모르겠다는 감상을 품고 있었다. 다른 바다도 많았을 텐데. 여기가 아니어도 되었을 텐데. 밤의 바다는 무정히 밀려왔다. 철썩이는 파도가 발끝에서 스러졌다. 의미 없이. 다시 쓸려가는 모래알. 반복.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나의 숨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고동. 별이 일렁이던 그 날. 너와 함께 여기를 왔었죠. 오늘은 구름이 끼어 별도 없네요. 마지막으로 이 기억을 추억하고 싶었던 건가. 그는 자조한다. 네가 도대체 나의 뭐길래. 그는 파도에 발을 담갔다.
밤바다는 따뜻했다. 그는 몸을 밀어 넣었다. 머리끝까지를 바다에 담그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숨을 멈춘다. 서서히 빛이 옅어지는 지점을 향해 걸었다. 물의 층이 완연한 어둠을 이루는 심해로. 발걸음을 고요히 옮기는 순간 그의 팔을 잡아채는 존재가 있었다. 아인은 모든 걸 짐작한 듯이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
지젤 파필리오.
나의…….
모래사장에 엎어져 한참을 콜록대던 지젤은 몸을 으슬으슬 떨었다. 잘못 삼킨 바닷물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머리카락을 젖은 모래 범벅으로 해서는 엎어져 숨을 헐떡이는 꼴이 꽤 험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겨울 바다에 빠진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콜록! 으, 여기일 줄, 쿨럭! 알았어요.”
“지젤. 나는…….”
“저는 아인 씨의 뭐예요?”
지젤은 드러누워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하반신이 포말에 들썩이도록 내버려 둔 채였다. 아인은 푹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나의 무엇이냐고. 그는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너의 무엇인지만 생각했지.
“그렇게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보고 싶어 하지도 말라고 하면 제가 얌전히 그렇게 할 것 같았어요?”
지젤이 읊조렸다. 그의 말소리가 조용히 아인의 귓가에 들러붙었다. 아인이 한 손으로 제 창백한 낯을 감쌌다. 그만. 그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젤은 그만두었다. 아인이 떨리는 어깨를 진정시켰을 즈음에 지젤은 일어나 앉아서 밤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평선을 뛰어넘고 싶어요?”
“난, 나는…….”
“심해로 가고 싶었어요? 그 춥고 탁 트인 어둠 안에 갇혀 있고 싶었어요? ……아인.”
지젤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회녹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없었다. 그는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아인은 뒷걸음질 치다가 모래에 부드럽게 주저앉았다. 무너진 신의 사자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 언젠가 수평선 너머로 가 볼까요?”
“지젤. 너는, …….”
“같이 가요. 아인 씨.”
지젤이 웃었다. 환하게. 먹구름이 잔뜩 낀 날인데도 그 미소는 별을 닮아 있었다. 아인은 홀린 듯 지젤의 모래투성이 머리칼을 손에 쥐어 들어 올렸다. 짤막한 입맞춤. 아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살아요. 되는 데까지. 빛도 없이 무서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지 말아요. 수평선을 향해 걸어요. 함께해 줄 테니까요.”
너는 나의 동행이다.
나는 너의 동행이다.
아인은 지젤의 머리카락을 놓고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겨울밤의 모래는 차가웠다. 또 감기에 걸리겠네. 인간은 약해서 안 되는데.
그는 웃어 버렸다. 픽 하고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감히 인간이 수평선을 논한다. 신의 사자의 곁에서 함께하겠노라 말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아아. 약하고 어리석은 생명체. 바보 같군요. 정말,
바보 같아…….